Chapter 14
잠에서 깨자, 어제와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얼굴이 한가득 시야에 들어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놀라지 않고 차분히 그 얼굴을 관찰했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하지만 보면 볼 수록 새로운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마치 양파와 같은 신비로운 미모는 감탄을 자아냈다.
우리는 어제 서로를 향한 감정을 확실히 했고, 또한 인정했다.
그 변화가 앞으로 어떤 일을 불러오게 될지 나는 아직 상상도 하지 못했지만, 확실한 것은 내가 결코 그 마음을 버리지 않을 것.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진짜 말도 안되는 일이긴 하네. 외신과 인간이 서로를…’
살짝 고민되는 것은 앞으로 우리의 관계가 어떻게 이어질 것인가.
가족….만으로 남기는 싫었다. 더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다.
그러자 문득 드는 생각.
‘…..부부 사이도 가족 아닌가?’
그 생각이 들자마자 정수리가 뜨겁게 달궈진다.
‘미, 미쳤어! 아직 고백만 했지 사귀는 사이도 아닌…..어?’
그러고 보니 지금 우리 사이는 뭐지?
고백은….어제 했다고 본다. 서로의 감정을 담아서 애정을 표현했는데 그게 고백이지 아님 뭐가 고백인가.
‘…서로 했으니까 이미 사귀는 건가?’
젠장, 이래서 모태솔로는 안된다. 도저히 관계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하겠다.
결국 릴리스 본인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힐끔 릴리스를 보자 떠오르는 어제의 기억. 이번에도 자연스럽게 시선이 입술로 향했다.
…이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입술로 하면 괜찮다고 본인도 허락했으니까…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결심을 굳힌 나는 천천히 릴리스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내 코 끝을 간지럽히는 릴리스의 숨결에 잠시 멈칫했지만, 아침햇살에 빛나는 저 진홍색 입술이 내게 이리오라 손짓하는 것 같았다.
-쪽
결국 참지 못하고 입술을 겹친다. 혹시라도 릴리스가 깰까봐 바로 떼고 반응을 살폈다.
“새액….새액…”
호흡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아마 이정도는 괜찮은 모양이다.
….그렇다면.
-쪽…..쪽…..쪽…
이상했다. 보통 보상을 얻으면 욕구는 가라앉기 마련, 하지만 입술을 겹치면 겹칠 수록, 오히려 내 마음은 더 커져만 갔다.
불같이 타오르는 마음을 참을 수가 없어 결국 그 원인이 되는 감정을 입으로 내보냈다.
“사랑해요.”
“새액….새액….”
릴리스는 듣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속마음이 우루루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사랑해요.”
-쪽
“가족으로서가 아니라….”
-쪽
“남자로서도 사랑해요.”
-쪽
“… 사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반했어요.”
-쪽
한마디 한마디가 끝날 때마다 갈구하듯 릴리스의 입술을 탐했다.
더더욱 커져버린 마음에 나는 평상시라면, 릴리스가 깨어 있었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말을 충동적으로 내뱉었다.
“사랑해, 릴리스.”
지금껏 해온 말에서 종결어미 하나가 사라졌을 뿐인데 전혀 다른 분위기를 담고 있었다. 그 분위기에 취한 나는 계속해서 그 말을 중얼거렸다.
“사랑해…사랑해….”
“정말?”
“응, 정말 사랑-…..우와악?!”
입만 움직였던 릴리스가 천천히 눈을 떴다. 장난스런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서 피어올랐다.
“후훗, 조금 내버려 뒀더니 바로 기어오르는 거야?”
…내버려 뒀다는 말은..!
“언제부터 깨어 있었어요…?”
“왜, 내가 들으면 안 되는 말이라도 했어?”
정답입니다.
달아올랐던 기분이 한순간에 식어버리며 등골이 싸늘해졌다. 곧이어 돌아온 이성이 내 행동을 질책했다.
‘네가 진짜 미쳤구나, 아무리 분위기였다고는 하지만 릴리스한테 반말을 해?’
“죄송해요 릴리스….”
“어머, 사과할 필요 없는데? 신선하고 좋았어.”
“으윽….”
아무리 감정에 솔직해졌다고 한들 릴리스의 말에는 당해낼 수 없었다.
“그리고…..어제 말했잖아.”
갑자기 거리를 좁힌 릴리스가 내 바로 앞에서 속삭인다.
“입술로 하면 봐주겠다고.”
어제의 모습이 데자뷰처럼 스쳐지나가며 심장이 쿵쾅거렸다. 릴리스의 달콤한 숨결이 느껴지는 거리. 서로 조금만이라도 움직이면 곧장 입술을 부딪힐 거리였다.
다시 한 번 달궈지는 분위기에 릴리스에게 다가가려던 그 순간.
“아침 먹자!”
릴리스가 벌떡 일어나며 막 일어난 고양이처럼 기지개를 폈다.
‘….방금 그런 분위기 아니었어? 나만 기대한거야?’
허탈한 기분에 멍하니 릴리스를 바라보는데.
‘음…? 저건…’
“아아~ 배고파라. 아서, 아침은 어제처럼 주면-”
나를 돌아본 릴리스의 동공이 크게 확대된다. 몸을 일으킨 내가 바로 릴리스 어깨부근에 얼굴을 대고 기다리고 있었으며, 고개를 돌린 릴리스의 입술이 정확히 내 입술과 겹쳐졌기 때문이다.
-쪼옥
릴리스의 입술을 한번 빨아본 나는 릴리스의 귀를 간지럽혔다.
“귀. 빨개져 있거든요.”
어딜 도망칠려고.
잠시 멍하니 나를 바라보던 릴리스는 이내.
“…..나도 아서.”
-라며 한마디를 툭 던졌다.
“네?”
“아까 나한테 한 말에 대한 대답이야. 나도 그렇다고.”
아까라 하면…..
“…역시 듣고 있었죠!!”
“푸흐흐…귀여워라.”
포기. 기브업이다. 도저히 이길 수가 없구만.
—-
“그럼 다녀올게요 릴리스.”
“응, 점심 때…아니 그보다 더 일찍 볼 수도 있겠네.”
“네?”
“아냐. 이따가 보자.”
뭔가를 꾸미는 것 같아 보였지만 일단은 릴리스에게 손을 흔들며 기숙사를 나섰다.
어제보다 더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걸어가다보니 역시나면 역시나.
“아서!”
레티가 달려왔다….. 뭔가 심각한 얼굴로.
“너 어제 루이스한테 처맞았다며!”
….처맞다니… 뭐, 틀린 말은 아닌가?
“그새 소문내고 다닌 모양이네.”
“진짜구나?! 몸은 괜찮아?”
“….알잖아.”
“아…너한테는 이런 걱정 별로 의미 없구나.”
나를 이리저리 살펴보던 레티는 납득한듯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나저나 최근 좋은 일이 많은 모양이네? 얼굴이 확 폈어.”
“그래?”
“응, 완전 다른 사람같아. 어제 처맞은 사람이라고는 생각도 못할 정도야. 무슨 일이야? 설마 가족일?”
아마 릴리스 덕분이겠지.
“응. 가족 덕분이지.”
“다행이네. 좋은 가족인가봐?”
“….분에 넘칠 정도로.”
“헤에~ 아서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엄청 좋은 사람인 모양이네. 잘 됬구만.”
나를 얼굴을 이리저리 뜯어보는 레티.
“한가지 궁금한 거. 나는 가족을 사랑한다. 오, 엑스.”
“오.”
고민할 가치도 없는 질문이다.
“와…. 나 아서가 이러는 거 처음봐. 완전 푹 빠진 모양이네……잠깐, 그분 여자셨지?”
“맞아.”
“나이는?”
“…..좀 많지?”
사실이긴 하지만….. 죄송합니다. 릴리스.
“그래? 다행이네.”
….뭐가?
어쩐지 기분이 좋아진 듯한 레티는 계속해서 내게 가족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릴리스의 정체에 관한 질문은 최대한 피해가면서 내 나름대로 성실히 답변을 해줬다.
그렇게 수다를 떨며 강의실에 도착할 때 쯤.
“아 맞다! 너 책 찾으러 언제 갈 거야?”
아, 그게 있었지?
“레티, 문제가 있어. 금지구역 내 책들은 대출금지래.”
“뭐엇?! 그런 건 어제 바로 말해줬어야지!”
말하려고 했는데 네가 쓰러지며 절규하는 바람에 까먹었거든?
“그럼 어쩔 수 없네. 플랜 S를 가동시킬 수밖에…”
“어제도 궁금했던 건데… 도대체 플랜 S가 뭐야?”
“당연한 거 아냐? 플랜 사보타지(Sabotage), 이른바 폭발은 예술이다 작전.”
“도대체 그게 무슨 계획이야?!”
“후후후, 플랜 S를 위해 마법촉매들을 구해놨지. 적절히 조합하면 꽤나 강력한 폭탄이 완성될 거야.”
이건 미친짓이야. 난 여기서 빠져나가야겠어.
“어디가 아서? 도와주기로 한 이상 끝까지 도와줘야지.”
“난 책을 구해다 주는 걸 도와준다고 한 거지. 테러를 도와준다고는 안했어!”
“테러라니! 사보타지라니까? 폭탄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터뜨릴 거야. 시선이 쏠린 틈을 타서 네가 책을 가져오면-”
“총장님이 이미 도난방지마법을 걸어두셨어. 무조건 실패할 걸?”
“뭣이?! 이런 빌어먹을 영감탱이! 노망 났으면 관짝에나 들어갈 것이지!”
얘가 진짜 미쳤구나.
다시 말하지만 아카데미 곳곳에는 마이크가 설치되어 있다. 얘는 진짜 언젠가 잡혀갈 거야.
“이보쇼 학생. 정신 차리고 얌전히 수업이나 들으러 갑시다.”
“크으윽! 정녕 아무 방법도 없단 말인가!”
거참 포기를 모르는 녀석이다. 여러모로 존경스러운 친구…..잠깐, 존경? 내가 어제 이 말을 했었는데….언제 했더라?
레티와 함께 강의에 들어가면서까지 어제의 기억을 되새겨가던 나는 마침내 떠올릴 수 있었다.
‘존경…존경…..존경…….맞다! 그 이상성욕자들!
기억을 최대한 되살리며 교과서 구석에 어제 야설(추정) 책장에서 본 문어인간을 따라 그렸다.
이어서 옆자리에 앉은 레티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속삭인다.
“레티. 너 혹시 이렇게 생긴 얘 본 적 있어?”
문어인간 그림을 본 레티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너….. 혹시 취향이…”
“아니야! 어제 금지구역에서 본 책표지라고!” (속삭임)
“진짜? 이런 책도 있어? 그럼 진짜로 ‘소꿉친구’도 있겠는데?”
“아니, 그건 됐고. 이거 본 적 있냐니까?”
“흠… 이런 디자인은 처음 봤어. 근데 비슷한 디자인은 많이 봤지.”
“그래? 어디서?”
“야설이지. 촉수물이라고 들어봤어?”
“….심연이야?”
심연은 레티가 사용하는 은어다. 본인 왈 바닥 중에서도 밑바닥에 해당하는 심각한 무언가라고…
“어. 좀 심해.”
레티가 저렇게 말할 정도면 많이 심각하단 소리다. 불안한 마음 밖에 들지 않았지만 솔직히……조금은 궁금했다.
‘외신을 상대로한 야설이라….설마 릴리스도 있을려나?’
“주제가 혹시….외신 같은 거야?”
“응? 아스트랄 하긴 한데. 마침 방에 하나 있어. 왜, 빌려주랴?”
“아니. 그건 아니고.”
날 뭘로 보는 거냐.
“왜, 궁금하지 않아?”
“…..궁금하긴 한데.”
“점심시간에 가져올게. 흐흐흐, 아주 화끈할 거시여.”
“아니, 야…”
“므흐흐흐흣 드디어 순수한 아서를 타락시킬 기회가 왔-”
또다시 이상한 소리를 중얼거리기 시작하는 레티를 무시하며 수업에……집중하지 못했다.
‘그 책에서 릴리스가 나온다면? 바, 바로 덮어야 겠지? 아니면…..사전조사 차-‘
곧장 손을 들어 내 뺨을 있는 힘껏 후려쳤다.
-짜악!
“뭐, 뭐해 아서?!”
교수님과 레티를 모든 학생들이 나를 돌아봤고 나는 붉어진 얼굴을 들지 못했다.
‘사, 사전조사는 개뿔. 미친 거 아냐?’
—-
다음 시간은 레티와 갈라지는 수업이었다.
지루한 수업을 멍하니 듣던 나는 이윽고 한가지를 떠올렸다.
교복의 마법 주머니에 손을 넣은 나는 새까만 책을 꺼냈다.
‘네크로노미콘. 그래, 이게 있었지!’
무려 해석본인 이 책이라면 조금 더 이해하기 쉽지 않을까?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다른 학생들을 살핀 나는 조심스레 책 표지를 넘겼다.
목차가 써진 메모를 넘기자 알 수 없는 날카로운 글씨와 해석자의 글씨가 함께 기록된 쪽들이 이어졌다.
-나, 압둘 알하자드는 그들의 계시를 받고…
‘아, 서론이네.’
그대로 넘겨버렸다. 내용을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하지는 않을 테니까.
페이지를 넘기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삽화였다.
기괴한 형태를 가진 무언가를 스케치한 듯한 삽화는 보는 이로 하여금 혐오감을 들게 만들었다.
‘으윽… 외신을 그린 건가? 진짜 못생겼네.’
새삼 릴리스가 얼마나 대단한 건지 돌이켜 본다. 아마 외신 최고의 미녀 아닐까?
삽화 아래에는 설명글이 쭉 써져 있었다.
-이름 차토구아. 운카이의 지배자, 두꺼비의 신
…..잠깐. 이거 진짜 야설 맞나?
글을 천천히 읽어가던 나는 뭔가 이상함이 느껴져 바로 다음 장으로 넘겨 보았다.
-이름 고보게그. 두 번 말해지는 이.
-이름 보크루그. 거대한 물도마뱀, 사나스의 파괴자.
‘어라? 삽화와 함께 설명에 충실한 문장들… 이거 설마 사전인가?’
다시 한 번 해석자의 목차 메모를 쭉 훑어보았다.
1. 그레이트 올드 원과 아우터 갓
2. 그들의 역사
3. 소환법
4. 주술
5. 흑마법
6. 묵시록
‘…..이거 아무리 봐도 야설은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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