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3
1.
“그래서, 나한테 왜 그런 지시를 내렸던거냐?”
나나시와의 대련이 끝난 저녁, 네루는 아카네를 C&C 부실로 돌려보내고 인적이 드문 곳에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대방은 네루의 물음에 후후- 하며 웃음소리를 내더니 여전히 능글맞은 목소리로 말해왔다.
[마음에 드셨나요?]
“그래. 괜찮은 녀석이긴 했지. 네가 왜 나한테 접근하도록 시켰는지가 이해가 잘 안될 정도로.”
[시켰다니요. 저는 소소한 ‘부탁’을 드렸을 뿐이랍니다. 그저 사사로운 소문에 대한 확인을 말이죠.]
“하. 변명하고는. 그래, 그딴건 상관없으니까 다른 이야기를 한번 해보자고.”
여전히 진실을 답할 생각이 없는지 빙빙 말을 돌려가며 대답을 피하는 상대방. 헛웃음을 삼킨 네루는 꾹 참아내며 다른 질문을 꺼내들었다.
“세미나의 서기가, 그 후배를 감싸는 이유가 뭐냐?”
[…….]
“이 사실을 네가 몰랐을 리는 없잖아? 근데 아직까지 세미나의 움직임이 없다면 네가 그 사실을 감추고 있다는 뜻이 되겠지. 안 그러냐?”
네루는 나나시와의 싸움이 끝나자마자 수많은 일들이 있었음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대련장의 방음 처리, 아카네의 갑작스러운 호출, 그리고 CCTV의 기록 삭제까지.
은밀하지만, 노골적인 보호. 이번 나나시와의 대련에서 네루는 자신이 보이지않는 장소에서 수많은 이들이 얽혀있음을 알았다.
일부는 베리타스겠지만, 어느 영역에선 세미나가 아니라면 손을 댈 수 없는 영역도 있었으니.
그렇기에 네루는 자신에게 이런 ‘부탁’을 건넨 상대방이 그 범인이라고 확신했다. 그렇기에 궁금해지는 것이다. 어째서 ‘우시오 노아’는 실크를 감싸는가.
왜 세미나의 입장마저 버린 채, 그 아이의 신분을 세미나 동료들에게 알리지 않는가.
“서기인 네가 세미나를, 빅시스터를 갑작스레 배신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리도 없을텐데.”
[그럼요. 저는 언제나 세미나 소속인걸요.]
“그렇다면 어째서 실크의 정체를 감추었지?”
네루의 추궁에 통화를 하고있는 상대방, 노아는 작게 미소를 흘리며 대답했다.
그 목소리는 감출 수 없는 씁쓸함과 고뇌가 아주 선명하게 담겨있었다.
[그저, 저의 정치적 입장만으로 그 아이의 발걸음을 막아세우고 싶지 않았을 뿐이랍니다.]
“…….”
그 행동이 설령 세미나로써의 입장을 무시하게 될지라도, 노아는 실크의 행보를 막고 싶지 않았다.
네루에게는 말못하는 사정이었지만, 그녀에게 주어진 어떤 ‘능력’은 남들 모르게 그녀의 속을 아주 깊게 곯도록 만들기에는 충분했으니까.
완전기억능력.
힘들었던 기억, 상처 입었던 기억, 우울했던 기억.
노아의 정신을 갉아먹는 수많은 기억들이다.
최근 한달동안 총학생회장이 사라지며 무너진 치안과 질서는 그러한 노아의 부정적인 감정을 더욱 쌓도록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그런 때에 나타난게 바로 ‘실크’이다.
실크는 처음 등장한 순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꾸준히 정의를 실현해왔다.
그 탓일까, 노아는 어느샌가 뉴스에 실크의 소식이 나올 때마다 정신을 집중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에게 정신을 집중하고 있노라면 힘겨운 기억들을 잠시나마 그녀의 모습으로 덮을 수 있었기에.
더 나아가, 히어로든 일반 학생이든 모두 동일하게 변하지않고 선행을 베풀며 살아가는 그녀를 볼때면 자신의 마음 속에도 희망이 들어차는 것을 보았기에.
그래서 그랬던 것일지 모른다.
그런 실크였기에, 세미나의 어두운 손길이 그녀에게 향하는걸 원치 않았는지도 모른다.
[세미나의 서기인 제가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이 이상하다고 여기실지 모르겠으나, 저는 실크의 존재가 밀레니엄에- 그리고 키보토스에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 후배 녀석이 훗날 세미나를 적대하게 된다고 해도 말이냐?”
[그럼요. 저는 다른건 몰라도 실크의 정의를 깊게 신뢰하고 있으니까요.]
세미나 서기라는 직책에 걸맞지 않는 독단.
하지만 그럼에도 노아는 C&C의 네루에게 부탁을 한 일에 대해선 후회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체를 들키진 않으셨죠?]
“아카네한테는 잘 둘러댔다. 그냥 소문을 듣고 찾아간 것에 불과하다는 이유로 말이야. 그러니 세미나 쪽은 네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해. 귀찮은 일 없게.”
[후후. 네루 선배님도 그 아이가 꽤나 마음에 드신 모양이네요.]
“…….”
네루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나시의 정체에 대해선 조금 놀란건 사실이지만, 그녀가 보인 끈기와 신념은 더욱 경악스러웠고, 나나시에 대한 정보를 조사하면서 혹평 따위는 일절 없는 소문들을 듣고는 헛웃음이 절로 나왔었다.
실크는 영웅이든 학생이든 어디서든 동일했다.
성실했고, 근면했으며, 더 나아가 선했다.
언제나 선행을 베풀고자 노력하며, 항상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그녀의 입장을 몰랐다면 C&C로 영입을 제안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네루는 나나시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모습에 네루 본인도 노아의 행동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게 됐을 정도였으니.
그저, 그렇기에 저 냉혹하다는 세미나의 서기가 빠지게 된 것이로구나- 하며 헛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물론 네루는 이런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자신의 사소한 소망만을 입에 담았다.
“그래. 나중에 다시 한번 붙고싶어질 정도로.”
[다행이네요.]
그것으로 두 사람의 은밀한 밀담은 마무리되었다.
2.
세미나의 서기, 우시오 노아는 과거를 회상한다.
여전히 머릿속에 또렷하게 새겨져있는 과거의 기억들. 도저히 잊혀지지 않는 고통과 같은 흔적들.
그 속에서 노아의 정신을 치유해줄 정도로 찬란하고 행복한 기억은 그리 많지 않았다. 대부분은 친구인 유우카와 다른 사소한 기억들 뿐.
하지만 최근 들어서 그런 기억이 생겨났다.
실크. 그녀에 관한 기억들이 바로 그것이었다.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다.”
친구의 유우카의 저러한 소감은 노아 또한 깊이 공감하는 부분이었다. 실크, 그녀가 영상 속에서 보이는 행보들은 모두 노아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기에.
시민을 구하고, 악을 벌하며, 끝내 승리한다.
타인의 절망을 좌시하지 않고, 언제든지 나타나 사건을 해결하고 불현 듯 사라진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숭고하고, 위대한 존재라며 감싸지 않았다. 영상 속에서 실크는 시민들에게 다정다감하며 사소한 문제들도 돕는 ‘이웃’처럼 나타났다.
그렇기에 세간에서 그를 부르는 명칭은 ‘친절한 이웃’이라는 이름이었다.
이는, 실크 본인이 ‘활동의 목적이 뭐냐’라는 질문을 받았을 순간에 대답했던 내용이기에 많은 이들이 그를 친절한 이웃이라는 호칭으로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단어는, 노아의 마음 속에도 깊이 새겨지기에 이르렀다. 자신을 드높이지 않고 동등하게 대해달라며 타인을 구하는 영웅을 보며 감탄을 흘렸다.
그 순간부터 노아는 ‘실크’의 족적을 쫓았다.
정확히는 그녀가 남긴 모든 것들을 기억에 담았다.
노아는 그런 자신의 행동을 ‘세미나’를 위한 것이라며 포장하고 변명하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에 대한 기억을 쌓아가면 쌓아갈수록 점차 실크를 응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결정타는, 와카모와의 싸움이었다.
“아니, 저 숫자를 혼자서 상대할 생각이야? 어떻게?”
“그러게요. 어림잡아도 중대급 규모인 적들을.”
재액(災厄)의 여우라 불리던 ‘코사카 와카모’와 실크의 대결. 정확히는 중대급 규모의 적들을 이끌던 와카모와 실크의 대결이었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실크는 점차 승리해나갔다.
와카모를, 수많은 적들을 상대로.
다른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유우카와 함께 뉴스로 실크의 싸움을 지켜보던 노아였다. 처절하고 힘겹게 싸움을 이어나가는 실크를 보며 유우카와 함께 때로는 초조해하며, 때로는 긴장하고, 때로는 기뻐했다.
그 과정이야말로 자신 또한 유우카처럼 ‘실크’라는 존재를 마음 깊게 받아들였다는 증거였으나. 노아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자신의 마음에 솔직하지 않았다.
화면에 실크의 목소리가 잡히기 전까지는.
[네가 되고싶은 존재는, 네가 결정하는 거야.]
[그러니 차라리 머리가 복잡하다면, 무시해.]
[그런 고민 따위는 미래의 네가, 혹은 다른 사람이 대신해서 해주겠지.]
실크가 와카모에게 건넨 위로의 말들.
하지만, 화면을 접한 수많은 시민들과 학생들은 그런 실크의 말이 자신들에게도 전하는 위로로 느껴졌고.
이는 노아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지금껏 머릿속으로 품었던 수많은 고민에 대한 해답.
정확히는 조언에 가까운 말들이지만 노아는 그것만으로 마음 속 실타래가 풀려나가는 것을 느꼈다.
“…고마워요, 실크.”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자각했다.
한참이나 품고 있던 ‘기억’에 관한 고민들.
자신이 유우카와 세미나 몰래 실크를 찾던 일도.
더 나아가, 세미나가 아닌 ‘우시오 노아’로써 실크를 응원하고 돕고싶다는 고민까지도.
“이젠 고민하지 않을거에요.”
실크- 나나시의 정체를 알아챈 순간부터 그것을 세미나에 알려야하나 깊게 고민하던 노아였다.
하지만 이 순간에 이르러 그녀는 결심을 내렸다.
“세미나의 서기인 제가 직접 세미나에 반하는 행동은 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키보토스의 영웅을 조금 돕는 일이라면.
아주 약간이나마 그녀에게 도움을 건네줄 수 있는 일이라면.
자신은 기꺼이 손을 뻗겠다며.
그것이, 우시오 노아가 이번 일을 계획한 이유였다.
3.
“그래서, 나나시?”
“네, 네…….”
“이번에는 무슨 벌을 받고싶나요?”
“…….”
히마리가 무릎꿇고 손을 번쩍들고 있는 나에게 물었다. 하지만 내가 무슨 대답을 할 수 있을까.
나는 그저 고개만 깊이 숙인 채 말했다.
“죄, 죄송해요…….”
“…….”
그래서 그냥 사과를 하니, 히마리가 잠시 한숨을 푹 내쉬더니 내게 다가와 머리를 콩 하고 때렸다.
“미인계 쓰지 마세요.”
“……네?”
“흠흠, 아무것도 아니에요. 좋답니다. 당신의 얼굴을 봐서라도 정말 가벼운 벌로 끝내드리도록 할게요.”
“헉.”
역시 히마리 선배야.
가끔 이상한 소리를 하시지만 역시 좋은 선배라니까.
진심으로 이번만큼은 히마리를 언니라고 해도 좋아.
“내일, 저와 함께 외출하도록 하죠.”
“외출… 이요?”
“네. 나나시가 저와 쇼핑에 어울려주는 것, 그게 이번에 당신에게 내릴 벌이랍니다.”
“뭣.”
고작 쇼핑이 벌이라고?
“나나시가 다친걸 보고 화나기는 했지만, 네루 씨가 나타나는건 저조차 예상하지 못하는 일이었으니까요. 거기다 C&C에서 비용도 다 감당한다고 했으니. 실질적인 손해는 없답니다.”
“…….”
“정체를 드러내는 경솔한 행동은 벌을 주고싶지만… 이 부분은 정황을 들어보니 안심해도 될거에요. 상대가 네루 씨라면요. 거기다 별개로 정황도 있어보이고요. 그러니 큰 벌은 내리지 않을 생각-”
그녀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감격스러운 감정을 참을 수 없던 나는 히마리에게 안겨들었다.
“히마리 언니……!”
“어머. 나나시도 참. 그렇게나 좋은가요?”
당연하죠. 어떻게 싫어하겠어요.
이대로라면 히마리한테 사랑 고백도 가능할 정도다.
“진짜 마음만은 뽀뽀라도 해주고 싶은데.”
“네, 네에─?! 나나시, 그게 무슨, 뽀뽀라니……!”
갑작스럽게 껴안으니 당황했는지 팔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내게 떨어져달라고 호소하는 히마리였지만, 나는 더욱 히마리를 강하게 껴안았다.
그리고 귓가에 속삭이듯 물었다.
“해도 됩니까?”
“……?!”
여자들끼리는 친근함이나 애정의 증표로 서로 볼뽀뽀도 한다던데.
키보토스에서는 조금 다르려나?
모르겠다. 일단은 여기 더 안겨있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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